[블래카틀] 약속
[블래카틀] 약속
트위터 @uzodayo 님과의 연성교환입니다.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카틀레야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천개가 늘어진 침대가 덩그러니 놓인 자신의 방. 도전자가 오기 전까지 늘 홀로 잠들어 있는 자신의 보금자리. 꿈이었음을 알고 크림색 푹신한 자신의 침대에 웅크린 카틀레야는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 꿈은 무었이었을까. 적갈색으로 말라 바스러진 초원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향해 꾸물거리고 다가오는 끔찍하고 차가운 절망. 이전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폭주 할 때도 꾸지 못했던 꿈. 기억조차 나지 않을정도로 오랜시간 가지고 있었던 펜던트의 메달을 움켜쥐고 카틀레야는 더욱 몸음 움츠렸다. 다시 잠들었을때는 무서운 꿈이 아니기를.
눈을 깜박였다. 시야가 낮다.
작은 손, 짧은 팔. 당황스러운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이 잠들었던 챔피언 리그의 방이 아니다. 싱그러운 풀밭. 아아, 여기는 기억하고 있다. 신오. 잔잔한 바람과 향기로운 꽃으로 가득한 꽃향기 마을.
꽃향기에 파묻혀 있다 보면 지기 싫어하는 마음도, 폭주할 일도 없었기에 어릴적 한동안 이곳에서 요양을 했었다. 그렇다면 이건 기억나지 않던 어린날의 기억일까. 향기로운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언제나 곁에 있던 코크런이 보이지 않는걸로 보아 자신이 심부름을 보냈거나, 코크런 몰래 나와 있다는 말인데, 과연 자신이 코크런을 따돌리고 나와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카틀레야는 무릎을 모아 세워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푸른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따듯한 공기가 서늘해질 무렵 웅크린 카틀레야의 앞으로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코크런이 찾아온걸까. 자신을 혼자 둔것에 대해 말을 해야 할지, 심통을 부리려 고개를 들던 카틀레야의 머리에 푹 커다란 챙의 모자가 씌워졌다.
“늦으면 돌아가야지.”
아직은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지 않고 모자를 매만지던 카틀레야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결국 왔잖아.”
“올때까지 있었을테니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소년이 반쯤 채워진 물병을 가방에서 꺼내 슥 내밀었다. 오랜시간 물 한모금 대지 않고 앉아있던터라 메마른 입술을 축이고 물을 입 안에 머금었다. 눈앞의 이 소년은 대체 누굴까.
생각을 하는것도, 움직이는것도 자신이지만 자신의 의지로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것은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
“미안해.”
“미안하면 일찍 와.”
조금전까지 마시던 물병을 다시 건네자 받아들던 소년이 한숨을 내 쉬었다.
“그게 아니라.”
고개를 들어 소년을 올려보고 싶건만 커다란 모자의 챙이 시야를 방해한다. 아니, 상대를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저 소년이 자신에게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은 확실하기에.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대신이라기에는 미안하지만, 앞에 선 소년이 부스럭대며 몸을 움직였다. 모자 챙 아래 카틀레야의 시야로 내려와 닿은 것은 카틀레야가 잘 아는, 악몽을 꾸는 날마다 꼭 쥐고 잠들던 펜던트의 메달. 조금전까지 소년의 목에 걸려있어 온기를 지닌 목걸이가 카틀레야의 눈 앞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카틀레야의 무릎 위에 다소곳이 올려져있던 손을 끌어다 손바닥 위에 펜던트를 내려놓은 소년은 카틀레야의 손을 오므려 메달을 쥐게 하고 손을 떼었다.
“공주님, 고향에 돌아가서도 잘 지내.”
시야를 가리던 큰 챙의 모자를 걷어 쓰고 돌아가는 까만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카틀레야는 손안의 아직 온기를 띈 펜던트의 메달을 내려보았다. 출처를 기억하지 못하던 소중한 펜던트의 주인. 결국 얼굴도 보지 못했다.
한숨을 내 쉰 카틀레야는 꽃밭 위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치맛자락을 털고 별장으로 향했다.
눈을 감고, 다시 뜨자 꿈이 변했다.
꽃향기 마을의 작은 자신이 아니다. 적갈색으로 말라 바스러진 초원. 불타는 듯이 노을진 주홍빛의 하늘. 그리고 그 초원에 서있는 자신을 향해 꾸물거리고 다가오는 끔찍하고 차가운 절망. 아아, 이것은 악몽이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주먹을 움켜쥐는데 움켜쥔 손바닥이 아팠다. 마치 무언가 이물질이 존재하는것처럼.
의아한 얼굴로 펴본 손바닥에는 소중한 펜던트의 메달이 반짝이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에서부터 따스한 감각이 퍼져나간다. 자신을 집어 삼키기 위해 다가오는 저 절망이 두렵지 않다.
손안의 메달은 움켜쥐고 다가오는 절망을 똑바로 바라보는 카틀레야의 앞에 검은 불꽃이 치솟았다. 말로 할 수 없는 친근감. 안도감.
이 불꽃은 자신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악몽이되 악몽이 아닌 꿈에서 깨어난 카틀레야가 세게 쥐어 손안에 붉은 자국을 남긴 메달을 멍하니 내려볼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신오의 챔피언이―.”
자신의 침실이며 도전자와의 배틀이 벌어지는 장소에 발을 디딘 것은 자신과 같은 하나지방의 사천왕 중 한명, 블래리.
“뭐야, 나쁜 꿈이라도 꿨어? 얼굴색이 별론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성큼 방안으로 발을 디뎌 훅 가까이 다가왔다. 커다란 손을 들어 카틀레야의 이마를 짚은 블래리가 이내 열은 없는데, 중얼거리며 손을 떼었다.
“신오의 챔피언이 시간 나면 별장에서 만나자던데. 컨디션 안좋으면 그냥 쉬고.”
“당신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어.”
새침하게 쏘아붙이고 일어나는 카틀레야의 손에서 펜던트의 줄이 길게 늘어졌다.
“좀 들어 줘. 공주님 몸이 더 중요하니까.”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카틀레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늦게 자신이 한 말을 떠올린 블래리가 난처한 얼굴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시선을 피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하여튼, 아가씨 몸이 더 중요하니까 무리 하지 마.”
“그거 말고.”
물끄러미 올려다본 블래리의 얼굴에 곤란함이 가득 찼다. 꽉 쥐고있던 손을 펴 소중히 여기는 펜던트를 내 보이며 카틀레야는 똑바로 블래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약속, 못지킨다면서.”
시선을 피하는 것을 포기한 블래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참 딴청을 피우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 쉬었다.
“함께하겠다고 했던거? 그땐 어려웠지. 몰락 귀족인 나와 공주님이 어디 같나. 그래도 노력 했다고. 좀 봐줘.”
가만히 눈을 깜빡인 카틀레야가 메달을 움켜쥐었다.
이제 알았다. 어렸던 자신에게 이 펜던트를 주었던 상대. 불안정한 자신을 지탱해준 이 펜던트. 그리고 악몽에서 자신을 지켜준 검은 불꽃.
“공주님?”
갑작스레 품에 폭 안긴 카틀레야를 내려보며 블래리는 당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지만 카틀레야는 대답하지 않고 블래리의 품에 안겨 작게 미소지었다.
블래리, 그는 약속을 지켰다. 함께 걷지는 못했더라도 그는 자신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녀도 잊었던 오래된 약속이 지켜진 것을 되뇌이며 카틀레야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비록 몰락 귀족이었지만 그게 무엇인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요즘 세상에 신분같은건 크게 상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스스로가 불안정해 집사를 항상 동반한다는 작은 아가씨를 처음 만났을 때,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꼬몽울만큼이나 작은 손을 가진 누가봐도 고귀한 공주님 같은 소녀.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강해 무작정 약속했었다. 언제나 곁에서 함께 하겠다는 치기 어린 약속에 손가락을 걸며 당연한게 아니냐며 웃던 소년의 공주님은 소년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주민.
약속을 지킬 수 없어 미안한 마음으로 유일하게 품에서 떼어놓지 않던 펜던트를 풀어내며 소년은 염원했었다. 보잘것없는 물건이지만 이것이 소녀의 불안정한 마음을 지탱해주기를.
휴양 온 소녀가 떠나고 난 뒤로도 소년은 노력했다. 언젠가 다시 소녀를 만나게 되는 날, 그때마저도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끔찍했기에.
그러나, 싸우고 또 싸워 하나지방의 사천왕 자리에 올랐을 때 다시 만난 소녀는 소년을 기억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약속도 물거품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소년, 아니 이제는 청년인 그는 그래도 그녀가 반가웠다. 홀로 기억하는 약속을 지키며 그녀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출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소중히 여기는 그 펜던트를 발견했을 때 무척 기뻤다.
그렇지만 그것을 준 것이 자신이라고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공주님은 공주님의 길을 걷고 있었고, 자신은 그저 약속대로 함께 걸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복잡한 마음을 다잡으며 블래리는 품에 안긴 카틀레야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