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kemon/Short Story

[NINE] 은빛산 정상

Pialati 2016. 8. 22. 00:00

"아, 있다!"

조용하기만 한 산속에 울려퍼지는 명랑한 목소리에 동굴에 앉아 가만히 쉬던 레드가 툭툭 털고 일어났다.
조그만 가보리와 그가 빌려준 에브이를 데리고 험난하기만 한 은빛산 정상에 아무렇지도 않게 선 푸른 원피스의 소녀는 그가 단순히 의견일치를 통해 동생 삼았으나 주변에서는 친남매 아니냐며 의심하는 세상에서 가장 의견이 잘 맞는 의동생.
검은 머리의 그나 은청발의 아이나 전혀 다른 외모건만 놀라우리만치 잘맞는 아이를 보며 레드는 씩 웃었다.

"여기까지 웬일이야?"
"심부름! 그린 오빠가, 오빠한테 전하랬는데."

옆으로 멘 크로스백에서 끈으로 동여맨 한무더기의 편지 뭉치와 회복약, 그리고 최신 포켓몬 매거진을 꺼내놓는 나인의 어깨위로 피카츄가 쪼르르 올라갔다. 무게탓에 나인의 어깨에 올라가는것은 꿈도 못꿀 가보리를 내려보며 피카츄가 비웃고 가보리는 픽 고개를 돌리며 무시한다.

"그럼 나 갈게!"

잠깐 한눈 판 사이에 포켓몬푸드와 통조림, 말린 물고기와 육포를 꺼내놓은 나인의 말에 피카츄가 놀란 얼굴로 바라본다. 포켓몬 푸드에 관심을 쏟던 잠만보가 고개를 갸웃이고 강챙이와 프테라, 이상해꽃, 갸라도스가 슬금슬금 다가간다. 언제나 나인이 오면, 가보리가 태어나기 전에는 에브이가, 가보리가 태어난 이후로는 그녀의 가보리가 파트너가 되어 레드와 배틀 연습을 했기에 배틀 없이 먼저 돌아간다는것에 포켓몬들로써도 놀란것이다.
물론, 레드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뭐야, 벌써 가게? 온김에 상대나 좀 해주고 가지."
"오빠는 절대 안봐줄거면서. 오늘은 진짜 안돼. 상록시티에서 그린 오빠가 시간 재고 있거든."
"야생 포켓몬 만나서 늦었다고 하면 되잖아."

아쉬워하는 포켓몬들을 보라며 레드가 대안이랍시고 내놓자 강챙이와 잠만보가 그녀의 길을 막으려는듯이 등 뒤로 이동했지만 나인은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린 오빠가 오빤줄알아? 그거 피해다니는거 포함이야. 체력을 잰다나 뭐라나, 하여튼 여기 정상에서 체류시간 30분 줄거라고했어. 그리고 에브이가 나랑 여기 다닌지 1년 반이거든? 이제 웬만한 야생 포켓몬은 먼저 에브이 보고 도망가더라."

실제로 조금전에도 올라오면서 만난 두트리오가 나인과 그 옆의 에브이를 보자마자 기겁하고 도망가는 모습에 당황했던 나인이다. 그녀가 애용하는 지름길에는 거의 야생 포켓몬이 지나다니지 않지만 가끔 운이 없는 경우에는 이번처럼 만나기도 하는데, 작년 연말 회의때 에브이와 몇번씩 산을 오르내렸던 탓인지 오랜만에 본 야생 포켓몬이 도망가는 모습은 솔직히 조금 충격이었다.

"걔네들 이 근처에는 얼씬도 않던데. 그래서 진짜 지금 간다고?"
"응. 삼십분 넘겨서 내려갈때는 뛰어가야돼. 그리고 그린 오빠가 오빠 훈련 방해하지 말랬으니까. 슬슬 리그 열릴때랬거든."

이모한테는 오빠 건강하더라고 전해줄게, 정말 시간이 급한지 말조차 끝맺지 않고 뒤돌아서며 포켓기어의 시계를 확인하는 모습에 레드는 프테라에게 시선을 던졌다. 함께한지가 벌써 몇년인지, 이제 배틀때가 아니더라도 웬만한 의사소통은 서로 감으로 때려맞추는 레드와 포켓몬 사이에서 갸라도스가 울부짖었다.

"어? 뭐야. 갸라도스 왜?"

금세라도 달음박치려던 나인이 놀라 그들을 돌아보자 프테라가 나인의 어깨에 발톱을 박았다. 레드를 태우고 다니면서 아프지 않게 붙잡는 방법쯤은 진작에 깨우쳤다. 프테라가 나인의 어깨에서 날개짓을 시작하자 에브이가 꼬리로 나인의 허리에 찬 몬스터볼을 툭 쳐, 볼 안으로 돌아갔다.

"얼레?"
"프테라가 데려다준대. 가보리는 두고 갈거야?"

레드의 물음에 허둥지둥 가보리를 볼 안으로 되돌리고 나인은 레드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린 오빠가 방해하지 말랬다니까."
"내가 시킨거 아닌데? 프테라가 하겠다는데 뭘. 그리고 날아가는게 더 빠르잖아."

그럼 잘가, 프테라의 날개짓에 점차 몸이 떠오르는 나인을 보며 레드는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치마 끝을 모아 쥔 나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치마 입은 사람을 이렇게 날게하는게 어딨어! 다음에 올때는 이모 모시고 올거다!"
"시간 재는건 그린이라며? 불만은 걔한테 말해."

이모한테 혼내달랠거야, 짜증내는 나인과 달리 여전히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레드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인이 두고 간 물품들을 동굴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올해도 변함없이 겨울이 찾아왔다. 험준한 은빛산을 달맞이산인양 드나들던 소녀가 발길을 끊은지도 벌써 6년. 그에게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 주던 일은 그린의 피죤투와 유리 누나의 파비코리가 대신하지만 역시 사람과 포켓몬의 차이는 큰 법이다.
동굴 입구 가까이에 앉아 모닥불을 피우고 흰 눈이 내리는 동굴 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레드의 곁으로 피카츄와 에브이가 다가왔다. 피카츄가 그의 어깨에 올라타고, 에브이가 옆에 자리 잡고 앉는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모두가 기다린다.
다들 아닌척 하지만, 이상해꽃이 이제는 드물어진 나무열매를 찾아다니며 모으기 시작하고, 먹성 좋은 잠만보가 이상해꽃이 모아둔 나무열매를 손도 대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어쩐지 기운이 없는 갸라도스와 날씨가 많이 추워 훈련을 중지했는데도 동굴 안에서 근력운동을 하는 강챙이. 그리고 동굴 안쪽의 옛날에 만든 횃대에 앉아있는 프테라와 언제부터인가 동굴 입구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는 에브이, 피카츄, 그리고 자신.
10살의 생일을 맞아 여행을 떠나 매년 연말의 정기회의때 다른 지역 챔피언이나 체육관 관장들과 함께 돌아올 명랑한 어린 동생을 그냥 막연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 있다!"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려올것만같은 적막을 깨고 들려온 맹랑한 목소리에 그의 어깨에 앉아있던 피카츄가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신이 난 얼굴로 잠만보가 모닥불을 밟고 지나가고 에브이와 갸라도스, 프테라가 동굴을 나선다. 프테라를 어깨에 앉히고 강챙이, 이상해꽃과 함께 동굴을 나서자 보이는것은, 새하얀 설원에서 포켓몬들에게 둘러싸여있는 푸른옷의 소녀.

"다들 잘 지냈어? 으아, 잠만보! 나 압사시킬셈이야? 피카츄도 에브이도 건강한거같네."

잠만보의 짧은 팔 안에 갇혀서 맑은 웃음소리를 내는 나인의 곁에서 호연의 챔피언과 체육관 관장들이 즐거워하는 얼굴로 서 있다가 레드를 발견하고 인사를 해 온다.

"세상에, 나인. 오박사님 연구소보다 환영의 강도가 더 센데?"
"그거야 걔들은 나하고 얼마 못놀았으니까. 맨날 오빠하고 여기서 배틀 연습했거든."

사파이어에게 대꾸하던 나인이 그런데 오빠는 어디있나, 두리번거리다가 레드를 발견하자마자 크게 손을 흔든다.

"오빠! 나 왔어!"

밝은 얼굴로 활짝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드는 그의 동생. 이제는 어린 동생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어엿한 성인.
그러나.

"뭐야, 그 반응? 일년만이라고 우리가 콘테스트도 미루고 왔는데!"

예상했던 반응이 아닌지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 가슴을 젖히는 그녀의 옆에서 그녀의 로토무가 큰 소리로 웃는다. 처음 만나 남매가 되기로 하고 늘 똑같다. 아이가 컸다고 한들 변함없이 그의 말괄량이 동생일 뿐.
모자를 고쳐쓰며 걸어나간 레드가 씩 웃으며 나인의 머리를 헝클었다.

"내 반응이 뭐 어쨌다고. 안보는데서 사고친거 없지?"

오빠의 반응에 동생은 어깨를 으쓱이며 코웃음을 친다.

"그랬다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그린 오빠한테 혼나고 있지. 아, 오는길에 상록 체육관 들렸는데 신오 분들은 좀 늦는다고 연락왔대. 칼로스에서 오는 사람들은 초행길이나 마찬가지니까 나보고 마중 가라던데. 관동하고 성도 사람들은 내일쯤 올라올거라고했고, 또……."

또 뭐 전하랬는데. 열심히 말을 늘어놓던 나인이 기억을 더듬자 그녀의 목걸이가 변화한다. 몬스터볼이 아니라 변신으로 붙어있는 메타몽이 신체를 변화시켜 성을 만들어보이자 짝, 나인이 손뼉을 쳤다.

"맞다, 크리스 언니가 골드 오빠하고 은동이오빠 데리고 하나지방으로 출장가서 이번에는 하나지방 사람들은 안온대. 전달사항 끝!"
"뭐야, 그럼 이번에는 걔네는 빠져?"
"이게 다 오빠들이나 언니들이 포획을 게을리해서 그런거거든요? 애초에 오박사님이 크리스 언니를 왜…!"

울컥 해서 대드는 나인의 머리위로 커다란 새가 날아가고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잔소리는 거기까지. 늘 말했지? 레드는 바보니까 얘기해봤자 소용 없다고."
"블루 언니!"

푸린이 부풀렸던 몸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그런 푸린을 몬스터볼로 되돌린 블루가 살짝 윙크하며 인사하자 나인과 사파이어가 활짝 웃으며 그들만의 수다를 시작하는 모습에 레드는 고개를 저었다.
쟤랑 어울리면서 애가 이상한거만 배웠어, 투덜대면서도 아직 인사가 아직이라는것을 알기에 레드는 호연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호연의 챔피언이 예의를 차리며 인사한다.

"성호 챔피언, 지난번 리그전에서의 방어도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분들도 하시는 일인데요. 그나저나 하나지방에서 안온다는건 아쉽네요. 아이리스씨가 이향 씨 보고싶어하던데요."
"여전히 돌 찾아 다른 지방까지 다녀오시나봐요."

레드와 성호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모습을 슬쩍 훔쳐보던 나인이 이내 키득거렸다.

일년에 한번, 이렇게 모두와 모이는 날이 가장 즐겁다.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다시한번 만나는 날. 어릴때, 에브이의 도움을 받아 이곳과 태초마을의 길잡이 노릇을 하며 다른 지역의 관장이나 챔피언들의 이야기를 듣는것이 좋았다. 보지 못했던 풍경, 호연이나 성도와는 다른 포켓몬, 생활방식, 사고방식과 사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행의 꿈을 키웠다. 신오와 호연에 존재하는 포켓몬 콘테스트. 그리고 하나지방의 포켓우드.
그곳에 도전해 즐기는것, 다른 이와의 포켓몬 배틀을 즐기는것.
그 모든것을 꿈 꾸고 지금의 생활이 가능하게 된것은 모두, 레드와의 인연 덕분.

"나인!"

언덕을 올라오는 그린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 바라보자 어쩐지 화난 얼굴의 그린과 생글생글 웃는 마슈를 보고, 나인은 재빨리 이야기중인 레드와 성호 뒤로 숨었다.
아무리 그린이라도 호연의 챔피언 앞에서 화를 내지는 않겠지.
그러나 이미 익숙해진 그린은 차분히 성호와 호연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레드와 성호 뒤에 숨은 나인을 끌어냈다.

"숨어봤자 소용 없거든? 너 칼로스에서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 플라타느 박사님이 네 이름 나오고 침울해하시는데?"

아니 내가 한거라곤 그린 오빠한테 배운 직설화법밖에 없거든요? 근데 칼로스 사람들은 신오 사람들하고 같이 온다더니 왜 마슈 씨하고 플라타느 박사님이 벌써 온거야?
도망가겠다고 뛰려다가 그린에게 붙잡혀 울상을 지은 나인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간만에 시끌벅적한 은빛산의 정상에서, 레드의 어깨 위로 피카츄가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