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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다이] 네가 없는 세계

Pialati 2016. 12. 27. 13:06

레쿠쟈를 원시회귀 시키지 못하고 유성이 다가오는 현 상황에 이미 차원전이 장치마저 부서진 이상 호연의 멸망은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이끼 우주센터의 통제실에서 엄지손톱을 깨물며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다이고와 바닥에 엎드려 땅을 치고 있는 히가나의 모습에 다른 연구원들 또한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노라며 연신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었지만 운석의 충돌 예상 시간이 20분도 채 남지 않은 지금에서야 어느 방법이든 늦을것이 분명했다.

"미안해, 전 챔피언."

풀이죽은 목소리로 사과하는 히가나를 앞에 두고 다이고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히가나의 잘못은 아니다. 그녀는 조금 더 다른 사람을 생각했을 뿐이고, 이곳이 아닌 다른곳에 사는 사람들도 살리고 싶어했을 뿐이다.

"이러려고 이곳에 온게 아니었는…?"

빠른속도로 줄어가며 붉게 점멸하던 메인 화면의 숫자가 정지했다. 당황한 히가나가 주변을 돌아보자 마찬가지로 당황한 기색의 다이고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석고상마냥 경직되어 있었다. 다이고는 모르겠지만, 이 현상을 히가나는 안다.
그녀를 이곳에 보낸 자.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어린아이가 또다시 이곳에 나타난것이다.

"전 챔피언, 어쩌면 새로운 가능성이 나타났을지도 몰라."

커다랗고 까만 눈망울을 깜박이는 자그마한 연둣빛의 포켓몬을 보며 말하는 히가나의 목소리에는 숨길수 없는 희미한 열망이 가득했다.

"세레비?"

환상의 포켓몬에 대한 기록은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실제로 보는것은 처음인 다이고가 놀란 눈으로 세레비를 바라보았다.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멈춰선 사람들 사이를 유영하는 작은 포켓몬이 그들에게 다가와 주변을 어슬렁댔다. 기뻐보이는 히가나와 달리 다이고는 이 시점에서 등장한 세레비의 존재에 묘한 불쾌감을 느꼈지만 이미 히가나는 세레비를 향해 팔을 벌렸다.

"세레비, 부탁이야! 이 세계의 시간을 되돌려줘!"

절박한 소녀의 외침에 짖궂은 숲의 신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틀린건가, 히가나가 무릎을 꿇었을때 검은 홀이 나타나고 푸른색과 은빛을 몸에 두른 디아루가가 그들의 앞에 내려섰다.
신오의 전설에서나 보이던 저 포켓몬이 어째서 호연에, 다이고가 의아하게 보는 와중에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가 두 사람에게 전해졌다.

-세계를 구하고 싶은가?

당연한 물음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인간을 내려보는 시간의 신의 옆에 비죽 세레비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세레비가 이곳에 데려온 인간의 소녀야. 세레비는 개인의 시간은 움직일수 있어도 세계의 시간은 불가능하다.

"그말은 디아루가, 당신은 가능하다는 뜻입니까?

어째선지 잠긴 목소리로 묻는 다이고를 향해 디아루가의 붉은 눈이 향했다.

-나라면. 그대들이 원하는 시간으로 돌려주겠지. 수십, 수백의 이 별에 사는 사람들을 전부.

"그렇다면 부탁해! 이 세계를 구해줘!"

히가나가 소리친다. 거대한 시간의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히가나의 얼굴에 희망이 번져나갔다. 이제 살수있어. 전 챔피언도, 현 챔피언인 그 아이도, 나의 세계도.

-불가능하다.

희망에 가득찼던 히가나의 얼굴이 일순 찌푸려졌다. 방금 가능하다고 해 놓고서 지금 뭐라고 떠드는거야 저게.

-세레비의 도움으로 시간을 뛰어넘은 인간의 소녀야, 너로 인해 인과가 뒤엉켰다. 인간의 힘으로 인과에 관여한 인간의 청년과 너의 두 존재가 양립한다면 시간을 되돌려도 지금의 시간이 되겠지. 너의 죄는 아니나, 이 또한 사실이다.

디아루가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 사이에 작은 홀이 생기고 쨍그랑, 작은 단검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금속 덩굴이 휘감은 단검의 시퍼런 칼날에 다이고와 히가나의 얼굴이 비춰졌다.

-두 사람중 하나의 시간을, 대가로 갖겠다.

검은 홀 너머로 사라져가는 디아루가의 말을 끝으로 정지했던 시간이 돌아왔다. 부지런히 오가는 연구원들고 붉게 점멸하는 시간.
바닥에 놓인 단검을 주워든 다이고가 히가나를 힐끗 돌아보고 이내 조용히 통제실을 나섰다.

디아루가의 말 뜻은 간단했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이 칼을 몸에 박으면, 그토록 원한 호연을 되돌려주겠다.
그렇다면 자신의 시간을 대가로 내놓는것이 맞다. 그녀는 이 사건 때문에 다른 시간에서 찾아왔으니까. 편하게 살아온 자신과 달리 히가나는 홀로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왔으니 행복해져야 한다.
이끼 우주센터의 뒤편, 바다와 로켓 발사대가 놓인곳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그곳에서 벽에 기대선 다이고는 손안의 금속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을 그가 사랑하는 강철로 맺는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화낼 미쿠리를 생각하면서도 자조적으로 웃어보인 다이고가 단단히 단도를 움켜쥐고 심장을 노리고 내려 꽂았다.

"이 미친 전 챔피언!"

고함과 함께 달려든 검은머리의 아가씨가 칼날을 맨손으로 쥐며 그의 가슴을 파고드는 단검을 멈춰 세웠다.

"당신이 왜 죽는데! 그렇게 세계를 살리려고 발버둥 쳤잖아!"
"그러는 너야말로, 이 세계의 미래를 보기 위해 온게 아니었나?"

가라앉은 다이고의 목소리에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제 머리를 움켜쥐고 괴성을 지른 히가나가 이내 다이고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아들었다.

"잘 들어, 난 이미 죽은 사람이야. 내 세계는 이미 멸망했고, 막고자 넘어온 이 세계 또한 막지 못했어. 이 세계의 일원인 당신이 사는게 맞아. 디아루가도 그랬잖아? 나로 인해 인과가 뒤엉켰다고."
"그렇다면 나 또한 마찬가지. 세계의 멸망을 막겠다고 그런 짓까지 저질러놓고 결국은 막지 못했지. 내가 죽는게 맞아. 히가나, 너는 살아."
"웃기지 마! 당신이 뭔데 내가 사는걸 결정해!?"

험악한 얼굴로 달려드는 히가나의 주먹이 다이고의 얼굴에 꽂혔다.

"전부터 정말 맘에 안들었거든? 전 챔피언 씨?"

주저앉은채 맞은 자리를 손등으로 문지르는 다이고의 앞에선 히가나의 손에서 흘러나온 피가 은빛 금속을 타고 흘러내렸다.

"조금 더 소중히 여기라고. 타인만이 아니라 자신도 좀! 세계의 일원이 이방인에게 뭐라고 떠드는거야?"

"이미, 너도 세계의 일원이니까."

이미 히가나는 세계의 일원이었다. 아웅다웅 싸우고 말다툼을 하더라도 그녀가 사라진다면 그 빈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없으니까. 적어도 다이고에게 그녀는 꽤나 큰 비중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거 고맙네."

씩 웃은 히가나가 다이고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시선을 맞추었다.

"미안하면, 이 세계를 잘 구해봐. 또 차원전송장치니 뭐니 해서 내 세계까지 날려먹으려 들지 말고."

다이고의 손목을 당겨 시간을 확인한 히가나가 몸을 일으켰다.

운석 충돌까지 남은시간 5분.

"그럼 전 챔피언 씨, 안녕."

말갛게 웃는 얼굴로 제 가슴에 칼을 꽂아 넣는다. 허겁지겁 일어나려는 다이고의 얼굴로 뜨겁고 붉은 액체가 튀었다. 쓰러지는 히가나를 받아 안은 다이고의 손에, 옷에, 그녀의 생명이 묻어난다.
조금 전까지 히가나의 체내에서 빠르게 돌며 그녀를 움직이게 한 생명력이 흘러나와 식어든다.
마살라, 붉은 장미가 말라붙은 색. 그러나 이제부터 그에게는 오늘의 히가나를 떠올리게 하는 색일것이다.
식어 끈끈해지는 피를 뒤집어 쓴채 다이고는 히가나를 끓어안고 오열했다. 단순히 세계를 지키고자 했던 이가 이렇게 사라져야 하다니.
그 순간, 세계가 멈추었다.
그의 품에 안긴 히가나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하늘의 구름이 거꾸로 흘러갔다. 태양과 달이 떠오르고 지기를 반복한다. 손목에 찬 통신기의 시간이 거꾸로 흘러간다. 수많은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바라본 뒤에야 멈춘 시간은 마그마단과 아쿠아단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 아직 바위동굴에서 하루카와 유우키를 만나기 훨씬 전의 날.

히가나를 잃고 세계는 다시 돌아왔다. 그녀가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을 세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