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kemon/Short Story

악몽과 초승달 날개 - 上

Pialati 2017. 4. 25. 00:00
멀어져버렸다.
언제나 상냥하게 미소지어주며 그가 아는 지식이더라도 처음인것마냥 놀란 얼굴로 귀 기울여 주고,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 사람과 멀어져버렸다. 아마 원인은 내게 있을것이다. 그 사람은 언제나 상냥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으니까.
호연 지방의 챔피언, 나성호. 성호는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이였고 모두가 알만한 강자이며 인기인이었다. 그런 성호가 서쪽의 그의 집이 있는 이끼에서 나인이 거주하는 동쪽의 금탄까지 늘 찾아왔던 점을 생각하면 아마도 자신에게 친절히 대하는것에 그는 지쳐버린게 아닐까 싶었다.
조금 더 잘할것을. 늘 그 사람이 만나러 오는것만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만나러 갈것을.
오늘도 나인은 어두운 방의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고 있었다.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테일이 빠꼼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며칠째 식음을 전폐하고 울고 있는 트레이너가 걱정인 모양이었다. 울고만 있는 나인의 곁으로 가지는 못하고 그대로 오도카니 앉아 어찌할줄 모르고 바라만 보고 있던 테일의 꼬리를 누군가가 톡톡 건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테일의 꼬리를 건드린 에피가 방안의 나인을 뾰족한 코로 가리키고는 이내 앉아있던 소파로 되돌아갔다.
슬퍼하는 나인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것은 없었다. 그저 언젠가 방에서 나올 나인을 기다리며 기다리는것 외에는. 나인이 저렇게까지 우는것은 그녀의 포켓몬들에게도 처음이었기에 포켓몬들은 불안해하며 그저 나인을 기다렸다.
나인이 우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운다 해도 잠시 울고나면 울게된 원인에 대해 투지를 불태우는것이 그녀였기에.
테일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늘 활발하던 토토가 축 늘어져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었다. 메타그로스가 눈에 띄게 침울해져 있었다. 보리가 불안한 눈으로 문틈으로 보이는 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잘은 모르지만, 이대로는 안된다는것을 테일은 알았다. 소파 위로 뛰어올라 웅크린 에피를 건드려 부른 테일이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앞에 선 테일을 본 에피가 사이코키네시스로 문을 열어 아직 신선한 나무열매를 꺼내주었다.
금세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나무열매를 살짝 물고 테일은 나인의 방 앞으로 갔다. 들어가도 될까, 안될까. 머뭇대던 테일은 어두운 방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테일과 토토가 장난을 치면 화를 내더라도 결국 웃어주던 나인이다. 나인이 화를 낼 리가 없다.
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는 나인의 곁에 선 테일이 그 탐스러운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온것을 눈치채지도 못하는 모습에 꼬리를 축 늘어트렸던 테일이 이내 다시 꼬리를 치켜들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엎드린 나인의 앞에 나무열매를 내려놓고 흐느끼는 나인의 머리띠로 인해 드러난 얼굴을 테일이 핥기 시작했다.

"훌쩍, 테일?"

오래 울어 쉰 목소리로, 기운없이 나인이 고개를 들어 테일을 보았다. 나인의 얼굴을 핥던 테일이 툭, 나무열매를 밀어 보이고 나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인!"

테일이 걱정했나보다, 미안한함에 품으로 파고든 테일을 바라보던 나인의 귓가에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이 활기차고 자신만만한 목소리는 분명.

"블루, 언니?"

관동에 있을 언니의 목소리에 나인은 조금 놀라 일어나다가 휘청였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기운이 없다. 내가 얼마나 울었던거지.

"나인! 얘 어디갔어? 에피, 나인 어딨니? 얘가 너희 두고 나갈 애가 아닌데. 어머, 얘네 다들 분위기가 왜이래?"

거실에서부터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나인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비틀 비틀 걸어 나갔다. 방을 등지고 소파 앞에서 웅크린 에피와 테이블 위에서 늘어진 토토를 내려보던 블루가 흰 장갑을 낀 손의 검지를 치켜세워 턱을 누르고 있었다.

"언니, 왔어?"
"아, 역시 집에 있었구나! 나인 너—."

빙글 몸을 돌려 나인을 보며 말을 이어나가려던 블루가 초췌해진 나인의 모습에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워냈다.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그래서, 성호 오빠가—."

블루의 품에 안겨 다시 울며 나인은 더듬 더듬 상황을 설명했다. 매정했던 성호의 뒷모습. 더이상 지어주지 않던 그의 미소. 찾아오지 말라던 그 서늘한 목소리까지. 울음이 섞여 훌쩍거리면서도 더듬거리며 늘어놓는 이야기를 블루는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며칠을 울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직도 눈물이 나오는게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말을 끝맺은 나인이 혼나려나, 눈치를 보며 올려보자 블루는 입을 꾹 다문채로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역시 화내겠지. 언니마저 멀어지면 나는 어쩌나. 레드 오빠와 그린 오빠가 있지만 블루 언니랑은 다른데.

"고생했구나."

어떡하지, 생각하던 나인의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따듯한 체온이 그녀를 감싸안았다. 분명 화를 낼거라 생각했던 블루가 나인을 안아주었다. 꼭 끌어안고, 나인의 등을 토닥였다. 일정한 리듬으로 토닥거리는 그 리듬에 몸을 맡기고 나인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힘들었겠다."

그 이상의 말은 나인에게도 블루에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맞닿은 체온. 혼자 있는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는것을 두 사람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한참을 두 사람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나인의 눈치를 보는 포켓몬들도, 나인을 만나러 왔던 목적도 모두 잊고 블루와 나인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인의 울음이 잦아들자 그 등을 토닥여주던 블루가 힘을 주어 나인을 끌어안았다.


"언니, 화났지?"

"왜?"


블루의 물음에 머뭇대던 나인이 말을 이었다.


"언니는 이런거 별로 안좋아하잖아. 늘 나한테도 남자들은 멍청하다고 했고."

"화 안내. 그야 레드나 그린이나, 멍청한 녀석들 뿐이지만 여자들도 멍청한 사람은 있는걸? 게다가."


우울한 얼굴을 한 나인의 머리를 쓰다듬던 블루가 나인의 볼을 잡고 쭉 잡아당기며 씩 웃어보였다.


"네가 성호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아는데, 내가 그런걸로 화를 낼리가 없잖아요 요 꼬맹아."

"자모해서요—."


늘어났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습관처럼 볼을 문지르던 나인은 문득 아프지 않다는것을 깨달았다.

블루의 손이 매운것은 그들 의남매라면 잘 알고 있는것이었다. 그린이나 레드나, 블루에게 등을 얻어맞는것이 일상 다반사였고 나인 또한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볼이 쫀득하다며 꼬집혔었기에 그 악력과 고통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니까. 세상 모두가 네 적으로 돌아선다고 해도 나와 유리 언니는, 절대적으로 네 편이라는거 잊지 마."


생긋 웃어보이던 블루가 이내 불편한 얼굴로 덧붙였다.


"레드라면 네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하면 호연이든 신오든, 칼로스든 어디라도 쫓아갈거야. 그 녀석은 너라면 어떤것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네가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그린은 널 제지하려 하겠지만, 너도 알지? 그린이 그러는 이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험담을 듣는게 싫으니까."


웅얼거리며 대답하던 나인은 멀리 관동에 있을 두 명의 의형들을 떠올렸다.

레드는 누가 봐도 나인의 오빠라고 할정도로 그녀를 보호하려 들었고 아꼈으며 함께 놀았다. 숨겨뒀던 친동생 아니냐며, 외형은 다르지만 저 둘은 아무리봐도 남매라는 말을 수도없이 들었었다. 심심하다며 배틀을 신청하면서도 나인이라고 해서 봐주는 일도 없었다.

그린은 언제나 엄했고, 무모한짓을 하지 못하도록 그녀를 감시했다. 포켓몬 배틀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 뿐만 아니라 트레이너 또한 단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훈련을 시켰다.

레드와의 포켓몬 배틀이 강함에 대한 목표를 확고히 정하는 일이었다면 그린과의 배틀은 그녀의 수준에 맞춘 맞춤식 교육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이길수 있을것 같은데, 그린이 나인에게 맞춰주고 있다는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아슬아슬한 범위에서 승리를 가져가는 그린의 행동과 배틀이 끝나고 나면 레드와 그린 두 사람 다, 각자의 방식으로 포켓몬에 대한 애정과 유대감을 과시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레드와 그린이 달려올것을 안다.

그린이 유독 자신에게 엄한 이유도, 레드가 유독 자신에게 무른 이유도 나인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지금 블루가, 자신의 앞에 있는것과 같은 이유.

얼렁뚱땅 맺어진 의남매 사이지만 레드와 블루, 그리고 그린은 엄마와는 다른 애정을 거리낌없이 그녀에게 선물해 주었다.

나인이 그들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그들을 생각하듯이, 그들 또한 나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고마워, 블루 언니."


나인의 대답에 블루가 생긋 웃어보였다.


"힘들면 언제든지 응석 부리러 와. 나도 레드도 그린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우리들은 네 편이야."


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의 풍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가슴을 펴. 당당하게 웃어. 누가 네게 못된 소리를 하거든 되갚아 주렴. 마음 가는대로, 네 멋대로 하렴.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 우리는 늘 너를 지지하고 있고, 네가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그린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잖니. 불안해 하지 마. 너는 충분히 사랑받을 아이란다."


웃는 블루의 모습 위로 금이 그어졌다. 곧 산산히 부서져 깨져버린 풍경 안에서, 블루가 자신만만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네 곁에 있는 아이들을 잊지 마. 너는, 보리와 다른 아이들의 '어버이' 잖아?"


멀어지는 조각을 보며 나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축 처져 있을 필요 없다. 불안해 할 필요 없다. 관동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블루와 레드, 그린. 그리고 엄마. 언제나 곁에서 함께 하는 포켓몬들.

울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대로 멈춰서 있기에는, 아직 자신에게는 다른이도 많았다.


"사랑해."


블루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인은 잠에서 깨어났다.

지나치도록 생생한 꿈이다. 다크라이와, 크레세리아가 다녀간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끔찍한 악몽이었고 깨어나서 다행이었다.

나인은 눈을 깜빡였다. 눈이 뻑뻑하다. 화끈 거리는 눈과 눈가에 말라붙은 눈물을 보니 꿈에서만 운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밖에서 물건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껏 소리를 낮춘 에피의 울음소리와 어딘지 신난 테일의 울음소리에 힘없이 일어나던 나인의 눈에 이불 위에 놓인 아름다운색의 깃털이 들어왔다. 커튼을 걷지 않아 아직도 어두운 방 안에서 은은히 빛나는, 달빛을 머금은듯한 빛깔의 깃털.


"초승달 날개?"


신오를 여행할때 들렀던 운하시티에서 들었던 다크라이와 크레세리아의 이야기에 얽힌 깃털. 악몽을 쫓아준다는 그 깃털을 손가락 사이에서 돌려보며 나인은 고개를 갸웃였다. 이 깃털은 굉장히 희귀해서, 자신도 여행 도중에 단 한번 운하도시의 도서관에서 본게 다였다. 하나지방의 스트레인저 하우스에서 악몽에 시달리는 아이를 위해 이 깃털을 구하려 신오까지 다녀왔다던 아버지의 부정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만큼 희귀하고 보기 어려운 깃털이 왜 여기에?

의문의 깃털을 쥔 채로 어리둥절한채로 거실로 나선 나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식탁 위의 샌드위치 접시와 알맞게 익은 따끈한 반숙 달걀. 그리고 구운 나무열매까지는 평소의 아침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 옆에 놓인 저 반짝거리는 에메랄드와 분노의 호두과자. 그리고 익숙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그린의 사인이 들어간 편지.


"……보리, 혹시 성호 오빠가, 다녀갔어?"


나인의 물음에 보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잠든 사이에 성호가 다녀갔다. 성호와 관련된 악몽을 꿨으니 분명 성호의 이름을 불렀을터였다. 우는 소리를 들은게 아닐까, 그보다 어떻게 오빠가 들어왔었던거지.

패닉에 빠진 나인의 곁에서 토토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짖궂게 웃었다. 너희가 범인이냐, 한숨을 내 쉰 나인이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성호가 익숙하고 친근하긴 하지만, 그가 나인에게 위해를 가할리도 없어 방문자를 받아들였겠지만 최소한 자신이 자고 있을때만큼은 누구도 들이지 말아주었으면.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나면 포켓몬들에게 이 점에 대해 단단히 주의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인은 한숨을 내 쉬었다.

손에 아직 쥐고 있던 초승달 깃털. 방문자가 성호 뿐이었다면 아마도 이것은 성호가 가져다 준것일것이다.

특이한 돌을 찾아 온갖 지방을 돌아다니는 성호다 보니 그가 초승달 깃털을 가지고 있어도 이상할것은 없다. 분노의 호우과자와 에메랄드는 뭐지, 그린 오빠는 대체 언제 만난걸까.

슬쩍 고개를 들어 영롱한 빛을 자랑하는 초승달 깃털을 보던 나인은 문득 얼마전 루티아의 말을 떠올렸다. 몇년 전, 하나 지방의 어느 도시에 트레이너들의 배틀 시설이 생겼었다던가. 오픈 이벤트로 각 지방의 챔피언들과 체육관 관장들이 초청을 받았었더랜다. 윤진과 성호 또한 그곳에 다녀왔었더라면서 최근에 그 두 사람이 색다른 배틀을 위해 또다시 그곳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것은 그곳에서 가져온것일터였다.

포켓몬 배틀이라면 레드 오빠와 그린 오빠도 좋아할테니 그곳에 있어도 이상할게 없다.


"아, 진짜, 부끄러워서 어떻게 봐."


일부러 자신을 위해 선물과 오빠들의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

이렇게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인데, 그런 꿈을.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 했던가. 그말은 즉, 나인의 공포였다는 뜻이었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자신의 지나친 생각 탓에 성호에게 그런 역할을 부여해버렸다.

웅크린채 부끄러워 고개를 다시 무릎 사이에 파묻은 나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인 에피가 툭, 그녀의 등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으, 알았어. 준비 할게. 잠깐만."


예전에 엄마에게 생일선물로 받았던 특이한 장식의 목걸이를 꺼내 가장 가운데 놓인 장식 위에 초승달 깃털을 놓고 은빛의 긴 머리카락을 한가닥 뽑아, 장식의 고리와 깃털을 단단히 묶었다. 그린 오빠에게 주입받은 매듭법을 이런데 쓴걸 알면 그 오빠가 무슨 얼굴을 하려나.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내자 목걸이가 메타몽으로 변화한다. 엄마에게 받은, 초승달 깃털을 결합한 목걸이를 착용하고 나인은 어렵게 웃어보였다.


"메타몽, 미안한데 나중에 여기에 팔찌로 변해주지 않을래?"


손목을 가리키며 묻자 메타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찬장의 포켓몬 푸드를 꺼내, 포켓몬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나인 또한 식탁에 앉았다.

아침이 조금 평소와 달랐지만, 이제야 겨우 아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