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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성호] 너를 위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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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성호] 너를 위해.

Pialati 2016. 8. 22. 00:00

현대 AU

 






호연 대학교.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이니만큼 학교의 학생들도 평범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호연의 각 도시를 대표하는 행정시설 ‘체육관’ 그리고 그 시설을 책임지는 수장인 ‘관장’들과 그런 관장들 위에서 통솔하는 ‘챔피언’으로 이루어진 총학생회. 학교가 지역 정치의 축소판이라는 것은 이미 암암리에 퍼져 있는 사실이었다.

호연 굴지의 대기업 데봉의 후계자인 성호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지역사회의 원로기관 ‘협회’에 의해 ‘챔피언’으로 추대되었을 때 상황을 모르는 이들은 반발하고 그의 자질을 의심했다. 언제나 그는 신사적이었으며 상냥했기에 아무리 데봉의 후계자일지라 하더라도 호연 전체를 통솔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챔피언’의 자리에 어울리느냐는 여론이 형성되었지만 뜻밖에도 관장들은 그의 취임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성호의 챔피언 취임을 환영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마치죠. 회연하고 미혜는 잠시 남아서 도와줄 수 있을까?”


학생회의를 마치고 묻는 성호의 질문에 회의 자료를 모아 안은 미혜가 살짝 한숨을 내 쉬었다. 관장들이 회의실을 나가고 성호의 책상에 회연이 걸터앉아 대롱대롱 다리를 흔든다. 품위 없는 몸가짐에 미혜가 살며시 눈을 흘겼지만 회연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챔피언,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대수롭지 않은 일로 남게 한거라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미혜의 차가운 눈초리에 어색하게 웃어 보인 성호는 책상위에 걸터앉은 회연에게 시선을 던졌다.


“회연, 최근 이상한 낌새 못 느꼈어?”

“챔피언이 말하는 이상한거라면, 요새 돌아다니는 아이들?”  


유독 영능력자가 많이 배출되는 송화산 인근의 주민들 중에서도 특출난 회연이기에 미혜는 한숨을 내 쉬었다. 또 무슨 사건이 터졌구나.

아쉽게도 이후에 잡아두었던 네일샵은 예약을 취소해야겠다. 네일샵 뿐일까 당분간 사람을 험하게 굴리는 챔피언의 일을 도와야하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미혜가 서류를 읽고 있는 성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설명이 필요한데요.”

“여자아이들이 많이 돌아다녀. 엄청 울고 있으니까.”


회연의 말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뒤를 이어 성호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제일 위에 보이는 것은 호연지방의 지도를 프린트한 것. 여러 도시에 걸쳐 표시가 되어 있었다.


“최근 호연의 이곳저곳에서 실종 신고가 들어오고 있어. 주로 7세에서 13세의 여자 아이. 특이한점은 전부 아이들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거야. 납치의 흔적도, 시신도.”


성호의 지도 밑의 서류에는 실종자의 사진과 인상착의가 적혀 있었다.


“이런 건 경찰 쪽에서 할 일이잖아요?”

“그 경찰이 의뢰해왔어. 관장들도 자기가 책임지는 도시들이니까 알아챘을 테지만 정확히는 모를 거야.”

“그래서 회연에게 물어보신 거군요?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미혜의 물음에 성호는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물어야 하는 질문이었지만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기도 했다. 억울하게 죽은 자는 쉽게 이승을 떠나지 못한다고 회연은 줄곧 말했었다. 그녀가 짚어내는 살인사건 용의자는 용의자가 아님을 이제는 잘 안다.


“회연, 실종자들과 일치하는지 봐주겠어?”

“아까 봤어. 이 사람들 맞아. 다들 젖어있었어. 다쳐서 울고 있었어. 챔피언, 도와줄 수 있어?” 
 

어딘지 멍한 회연의 물음에 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라고 여기에 있는 거니까.” 
 

본래 ‘챔피언’의 자리는 성호의 것이 아니었다. 소중하고 또 소중한 소꿉친구. 현재 루네를 책임지는 관장인 윤진. 그의 통솔력과 능력이라면 충분히 챔피언의 직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협회는 윤진 대신 그를 내세웠다. 대외적으로 말해준 이유는 스승인 아단의 뒤를 이어 루네의 행정을 맡는다는 것 이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쯤은 성호, 그가 제일 잘 알았다.


“미혜, 조사를 부탁해도 될까?”

“알겠어요. 그럼.”


회의 자료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미혜가 빙글 몸을 돌리자 회연이 책상에서 깡총 뛰어내렸다. 이번 일에 회연은 꼭 필요하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미혜라면 잘 해낼 것이다.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위에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묻은 성호는 미간을 주물렀다.










같은 시각, 어두운 지하실의 가운데 화려하게 빛나는 남자가 서 있었다. 넝마가 된 사람을 앞에 선 연한 옥빛의 정장을 차려입은 화려한 인상의 미남자.

특수도시 루네를 다스리는 책임자, 관장 윤진. 또 다른 이름은 루네민족의 계승자 윤진.

루네민족은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랐다. 세간에서 마피아라 부르는 집단과 유사한 성격을 가졌으면서 일족이라는 틀 아래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제멋대로의 성향이 강한 루네민족을 유일하게 부릴 수 있는 존재가 계승자. 마피아로 치자면 보스와 언더보스에 해당하는 계승자의 후계자뿐이었다.

현재 루네민족의 계승자는 윤진. 그리고 그런 그의 후계자는 조카인 루티아. 두 사람 모두 화려하게 시선을 끄는 외모를 지녀 제멋대로인 루네민족 중에서도 가장 세간의 이목을 끌고 그 시선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삼촌, 그 얘기 들었어요?”


지하실의 한쪽 벽에 기대 선채 손톱 끝을 다듬으며 연한 물빛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루티아가 입을 열자 가운데에서 만신창이가 된 사내를 발끝으로 슬쩍 건드려보던 윤진이 상체를 비틀어 사랑스러운 조카를 바라보았다.


“얘기?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겼니?”

“재밌다면 재밌는 일이죠. 요새 실종 신고 많은 건 알죠? 우리 쪽은 거의 피해가 없지만 금탄과 검방울쪽은 피해가 심하대요. 이쯤 되면 바위오빠 귀에도 들어갔을 만한데.”


루티아의 말에 발끝에 걸리는 사내를 차내고 윤진은 벽에 기대 선 조카에게 다가가 과장스레 장갑을 낀 하얀 손을 내밀어 본다. 공주를 모시는 왕자처럼 내민 손에 루티아가 손을 얹고 삼촌과 조카는 사이좋게 지하실을 나왔다.


“루티. 그 이야기, 어디서 들었어?”

“늘 꽃을 가져오는 사람들에게요. 여러 곳에서 오니까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거든요.”


맑게 웃어 보이는 루티아의 대답에 윤진은 진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부나방 같은 자들 덕에 그의 귀한 조카는 귀한 정보를 쉽게도 얻어왔다.

루티아의 하이힐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내딛을 때마다 또각거리는 걸음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어린 나이임에도 사람 대하는 것에 능숙해진 조카를 칭찬해야 할지 좀더 순수하게 즐기지 못하는 현실에 아쉬워해야 하는 건지. 루티아를 후계자로 내세운 장본인이면서 윤진은 가벼운 한숨을 내 쉬었다. 
 

“오후에 파티가 있다고 했지? 미안하지만 에스코트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겠구나.”

“삼촌은요?”

“학교에. 성호의 상태를 봐야겠어.” 
 

사용인이 연한 옥빛의 정장위에 눈처럼 새하얀 트렌치코트를 걸쳐준다. 익숙하게 시중을 받으며 윤진은 한쪽 손을 들어 루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삼촌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는 안다. 그렇지만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것이 그리 좋지만은 않기에 루티아는 부루퉁한 얼굴로 삼촌의 볼에 가볍게 키스하고 떨어져 나왔다.


“이번 일, 바위오빠도 조사하겠지만 우리도 조사할거죠?”

“물론. 녀석이 알기 전에 해결하는 게 가장 좋지만.”

“그럼 이번 일, 루티아 참가.”  


씩 웃어 보인 루티아가 유난히 또각이는 구둣소리를 내며 복도 저편으로 멀어져가자 윤진은 저택의 입구에서 기다리는 자동차에 몸을 싣고 금탄도시 외곽의 대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총학생회가 자리 잡은 본관의 3층. 두툼한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어 특별한 문을 밀어 젖히자 서류가 어질러진 책상과 푹신한 사무용 의자에 몸을 묻고 잠든 성호가 시야에 들어왔다.

‘챔피언’의 자리는 쉬운 곳이 아니다. 지방 정치의 축소판. 챔피언은 관장들을 통솔해 지방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한다. 학생이라고 생각하기에 어려운 업무량을 소화해야 하는 형편에 호연을 대표하는 데봉의 후계자이기도 한 그는 회사일과 챔피언의 일을 병행하고 있으니, 그 책임감 강한 성격을 생각하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이다.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잠든 성호의 콧등에 걸쳐진 안경을 살며시 빼내어 책상위에 내려놓는다. 진한 보라색과 검은색 계열의 정장을 선호하는 그에 비해 밝은 색을 선호하는 윤진은 곤히 잠든 친구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 책상위의 서류들을 모아 정리했다.

데봉과 총학생회의 서류는 상단의 표식이 다르기에 분류는 수월했지만 분류 도중 읽게 된 몇몇 문서의 내용에 윤진은 미비하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으음…….”


어린아이 같은 잠투정에 모아놓은 서류를 내려놓고 손에 끼고 있던 흰 면장갑을 벗으며 성호에게로 다가간 윤진이 살짝 코를 모아 쥔다. 잘 쓰던 호흡기관이 막힌 상황에 인상을 찡그리고 곧 감겨있던 눈이 떠지고 연한 물빛의 눈동자에 빛이 깃든다.

친구의 휴식을 방해한 윤진은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잘 잤어?”

“윤진? 언제 왔어?” 
 


찌뿌둥한 몸을 길게 늘어트리며 묻자 윤진은 코트를 벗어 책상위에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어차피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기에 성호 또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며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을 내려보았다.

회연과 미혜가 조사를 시작했으니 곧 어느 정도의 결론이 돌아올 것이다. 현재까지의 실종사고가 ‘실종’이 아닌 ‘납치’라는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경찰을 동원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아는 두 사람이니 뒷일은 맡겨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호야.”

“응?” 
 

어릴 때나 듣던 애칭에 성호가 고개를 들어보이자 윤진은 두종류의 서류 뭉치중 하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거, 또 그 사람들이지?”

“아아.” 
 

서류뭉치의 제일 위에 위치한 것은 최근 어느 법적 분쟁에 휘말린 사건. 데봉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노라고 주장하며 언론을 이용해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상대 기업을 대상으로 성호의 아버지 나발명 사장은 무시하는 방법을 선택했었다.

상대방이 싸움을 걸어온다고 똑같이 대응하면 되겠느냐,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던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나 성호는 나직이 한숨을 내 쉬었다. 초기대응을 잘못한 탓인지 심심하면 피해자에게 사과하라며 달려드는 기업에게 언제 데봉이 이렇게 얕보였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봐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법적분쟁까지 끌고 간 뒤에는 언제나 데봉의 승리. 처음 몇 차례는 비상대책위원회까지 열려 밤낮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증거자료를 준비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몇 번이고 사용했던 자료들을 말을 바꿔 다시 사용하고, 상대방에 대한 사과문을 받아내는것에 익숙해졌다.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들까지도 사건이 일어나면 또 물고 늘어지냐며 농담으로 받아 넘기는 직원들을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한 성호가 독자적으로 조사를 시작한 게 현재. 문제의 그 기업은, 데봉에 달려드는 것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진아.”

“응?”


데봉에 관련된 서류나 총학생회의 서류 모두 나름대로의 기밀에 해당하는 문서들이었지만 윤진에게 보여주지 못할 것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윤진이 그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이걸 좀 봐줄래?”


두 분류의 서류중 하나를 집어 건네자 의아한 얼굴로 윤진은 서류를 받아들고 적힌 글을 읽어 내렸다. 루네를 제외한 호연지방의 8개의 대형도시. 그리고 7개의 마을에서 발생한 실종 사건. 각 도시와 마을에서만 보자면 한명에서 두 명의 적은 인원이었지만 그것이15개의 도시라면 말은 달라진다. 최소 15명. 최대 30명 이상. 비슷한 시기에 행방불명되기 시작한 아이들. 이것이 단순한 실종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무리 관심 없는 사람일지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었다.


“루네에서는 다행히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회연의 말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이미…….”

“알고 있어. 한두 명이었다면 모를까 열명이 넘어가는 인원을 데리고 있으면서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지.”

“회연과 미혜가 조사를 시작했지만. 아이들의 가족에게는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풀이 죽은 성호의 모습에 윤진은 한숨을 내쉬며 턱하니 성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도련님 아니랄까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얽혀든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피식 성호가 웃음을 흘리고 모인 서류들을 챙겨 가방에 담자 윤진이 벽에 걸린 프록코트를 집어 건네주었다. 짙은 검은색의 코트를 받아 입고 가방을 챙겨든 성호의 옆에서 윤진이 흰 트렌치코트를 다시 챙겨 입는다.


“진아, 이후에 일 많아?”

“네가 원한다면 아무것도.” 
 

진심을 가장한 농담에 성호가 깨끗한 웃음을 지어보이자 윤진은 나지막하게 웃으며 곁에서 걸었다.

본관의 현관에 대기되어있는 자동차를 타고 성호가 회사로 출근을 하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올라탔다.

탁, 문이 닫히고 조금까지 예쁘게 웃어보이던 청년이 순식간에 감정을 지워버린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다리를 꼬고 카 시트에 몸을 기댔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정장차림의 사내가 조심스레 룸미러를 움직인다. 윤진의 저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기에 사내는 얌전히 자신의 일에 전념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지난번에 데봉에게 싸움을 걸어온 머저리들이 있었지.”

“약속을 잡겠습니다. 그 외에 지시하실 사항이 있으십니까?”


사내의 물음에 팔짱을 낀 윤진이 크게 한숨을 내 쉬었다. 
 

“바로 가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사내가 아니다. 알겠습니다, 대답한 사내가 휴대폰을 조작하고 이내 부드럽게 차가 출발했다.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다. 그 고운 미간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건도 그의 회사에 싸움을 걸어오는 상대 기업도 모두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친구가 바라지 않기에, 윤진은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칼을 꽂는 사람들. 신기할 정도로 멍청하고 아둔한 주제에 제가 더 낫다며 바동거리는 꼴이 신기했다.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달콤한 말만을 바라며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토해내고 비난한다. 돈과 무력. 그 두 가지면 보통, 사람의 끝을 볼 수 있었다.

유일하게 다른 사람과 달랐던 것은 조카인 루티아와 오랜 시간 함께한 친구 성호 뿐.

언제나 올곧고 바른 친구는 마치 빛과 같아서, 함께 있다보면 자신의 더러움도 씻겨나갈 것 같았다. 소중하디 소중한 빛. ―그러니까 너만은 빛속에서 깨끗하게 웃고, 기대주길 바래. 널 힘들게 하는 건 내가 정리할 테니까.

창고 앞에 도착한 자동차에서 내린 윤진이 하얀 장갑을 벗었다.




“삼촌-.”


며칠 뒤 늦은 저녁, 일을 마치고 저택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안겨드는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윤진은 이어질 조카의 말을 기다렸다. 파티에 간다던 조카가 이 시간에 저택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기에.


“찾았어요.”


품에 안겨 소곤대는 목소리에 윤진의 눈이 달처럼 휘었다.


“우리 공주님, 파티가 지겨워졌나보지?”

“참,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우리 드라이브 가요!”


방금 차에서 내린 사람을 붙잡고 다시 끌어들이는 루티아의 모습에 윤진은 가만히 미소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운전석에 앉은 기사에게 작은 메모를 건네고 셔터를 내려 운전석과 뒷좌석을 완전히 격리시킨 루티아가 입고 있던 드레스에서 한쪽 팔을 빼냈다. 아무리 삼촌이라지만 이성이 있는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갈아입는 모습은 평범하지 않았지만, 윤진이나 루티아나 서로가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헐벗은 이성이 트레일러로 쏟아 진다해도 개의치 않을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인데다가, 이미 두 사람은 삼촌과 조카를 넘어 동지라는 의식이 강했기에 윤진은 루티아의 탈의를 보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허리 굵어진거같은데?”

“정말요? 아, 너무 먹었나봐.”


투덜대며 허리의 살을 잡아보고 울상을 짓던 루티아가 새까만 바이크 슈트에 다리를 끼워 넣었다. 몸매를 드러내는 일체형 슈트의 앞섶에 달린 지퍼를 올려 잠그고 씩 웃어 보이는 조카의 모습에 윤진은 슬쩍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후계라지만, 굳이 직접 손을 쓸 필요는 없을 텐데 루티아는 이렇게 직접 현장에서 움직이는 것을 선택했다. ‘참가’ 선언은 루티아와 윤진 사이의 약속. 어떤 일이라도 의사를 존중하고 필요한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지만, ‘참가’를 선언한다면 그 일은 참가자가 전적으로 맡는다.

호연의 실종 사건에 루티아가 참가를 외친이상 이 일은 루티아가 맡는 것이 옳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 좋아하는 파티도 빼먹고 조사를 했으리라. 성호의 말에 따르면, ‘챔피언’의 직속 간부진‘사천왕’의 회연과 미혜가 이 일에 투입되었다고 했다. 그만큼 극비에 해당하는 일이지만 자신의 도움 없이 루티아는 조사를 끝마치고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거다.

새까만 바이크 슈트와 한쪽으로 묶어 올린 머리. 가죽장갑은 루티아의 활동복.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마치 토벌전을 기다리는 용사처럼 눈을 반짝이는 조카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리던 윤진은 장갑에 묻은 얼룩을 발견하고 이내 이맛살을 찌푸리며 장갑을 벗었다.


“장갑, 새것 여기 있어요.”


타인의 접촉을 꺼리는 약한 결벽증을 가진 윤진임을 알기에 루티아는 밀봉된 새 장갑을 꺼내보였다. 윤진이 접촉을 허락하는 것은 조카인 루티아와 친구인 성호 뿐. 그렇지만 장갑 없이 살끼리의 접촉이 가능한 것은 성호밖에 없었고, 그걸 알기에 루티아는 혹시라도 손이 맞닿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그의 허벅지 위에 내려놓았다.

장갑의 비닐 포장을 뜯어 흰 장갑을 착용하고 나서야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루티아는 빙긋 웃으며 고양이마냥 몸을 웅크렸다.




얼마쯤 달린 차량이 멈춘곳은 보라도시와 단풍마을 사이의 외진 곳의 동굴. 루티아가 부른 루네의 사람들 앞에서 성호가 보면 좋아하게 생긴 동굴인데, 돌 수집을 취미로 가지고 있는 친구를 떠올리며 윤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보였다.

사정을 모르는 루네민족의 일원들은 언제나 무표정하던 계승자가 실소를 흘렸다며 두려워했지만 루티아는 질렸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입구는요?”


먼저 와서 대기하던 인원에게 묻자, 검은 정장의 여성이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대답했다.


“몇 명을 보내 뒀습니다. 그런데 사천왕이 근처에서 목격되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미혜와 회연이라면 안면도 있는 그가 맡는 것이 옳다. 역시 성호가 믿고 일을 맡길 정도로 유능한 사람들이군. 홀로 납득하며 윤진이 고민에 빠진 루티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입구 쪽은 내가 맡지.”

“삼촌이요? 그럼 잔챙이 부탁해요~”


길게 뻗은 손톱 모양의 클로너클을 끼며 웃어 보이는 루티아의 모습에 윤진은 빙글 몸을 돌려 안내하겠다고 나서는 조무래기를 데리고 입구로 향했다.

다른 일이었다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겠지만, 낮에 보았던 잠든 성호의 얼굴이 생각나 윤진은 동굴의 안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물론, 잠든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지만 자기관리가 철저한 그 나성호가 외부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게 피곤함의 정도를 말해준다.

유가족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하냐며 풀이 죽어 있었으니까, 이 정도는 해 줘야 공평하지.


동굴 안쪽에 작은 불을 놓고 조무래기에게 실종자를 찾아보라며 명령을 내린 뒤 아무렇지도 않게 입구로 돌아가 오게 될 회연과 미혜를 기다리면서 윤진은, 예쁜 모양의 작은 돌 하나를 주워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지금쯤 루티아가 날뛰고 있겠거니 대략적인 상황을 가늠하던 윤진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 경멸어린 눈으로 보며 미혜가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었고 회연이 불쑥 다가와 코앞에 멈춰 섰다.


“안녕, 루네 관장님?”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동굴을 한번 돌아본 회연이 다시 윤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적대적인 모습을 감출 생각도 없이 말을 내뱉는 미혜의 모습에 윤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루네일족의 특수성은, 협회와 관장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챔피언으로 거론될 때 그들은 내켜하지 않았던 것이었고 본인 또한 그런 자리는 필요 없었기에 친구인 성호를 추천했다. 루네일족이 유난히 개성이 강한 일족이라고 생각하는 천진난만한 친구를 제외하고는 루네라는 도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적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기에 윤진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까, 성호가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기에 도와줄까 하고.”

“챔피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시죠. 챔피언을 꼬여내기만 해 봐요, 가만 안둘 테니까.”

“무섭네. 이래봬도 성. 호. 의 소꿉친구인데. 두 사람보다 내가 더 그를 잘 안다고.” 
 

일부러 이름을 힘주어 부르자 미혜가 입술을 깨물고 윤진을 노려보았다.


“루네 관장님, 안에 가봤어?”

“아니 아직.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지.”

“그래.”


회연이 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동굴 안으로 향했다. 미혜와 윤진이 그 뒤를 따랐다. 검게 탄 불의 흔적에 미혜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윤진을 바라봤지만 윤진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곳곳에 쓰러진 사람들과 심한 전투의 흔적. 어딜 봐도 적게는 몇 명, 많게는 수십에 가까운 전투의 흔적에 의심은 가지만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윤진에게 추궁할 수는 없었기에 미혜는 말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의 목적은 유괴범의 체포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실종자들의 안전. 회연이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을 보면 생존자가 얼마나 될지, 걱정하며 도착한 동굴 한 편의 방에는 육중한 철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자물쇠를 어떻게 열어야 할까 미혜가 고민하자 윤진이 웬 도끼를 찾아와 자물쇠를 내리 찍었다. 어처구니없어 미혜가 허탈하게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여 보인 윤진이 도끼를 한쪽에 던져버리고 문을 밀고 방 안에 들어가자 끔찍한 참상이 세 사람을 맞이했다.

방 한쪽에 놓인 거대한 수조에 담겨 퉁퉁 불어있는 시체. 그리고 그 수조와 멀리 떨어진 벽에 겁에 질린 채 모여 있는 어린 아이들.

욕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미혜가 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다독이는 동안 회연은 수조의 아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루티아로부터 언제 나올 거냐는 연락이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구조대를 부르라며 답을 한 윤진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멀거니 방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성호가 울겠다.





 


팡, 팡! 연신 플래시가 터지는 단상 위에서 성호가 몸을 숙여 보인다. 호연 각지의 주요 언론들이 들이닥쳐 묻는 질문에 답하고 비난을 받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윤진의 얼굴이 굳어갔다. 저들도 모르던 것을 남들보다 빨리 알아챈 덕에 피해가 이만큼에 그칠 수 있었다. 생존한 아이들중 큰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범인들은 아이들을 고문하며 즐거워하던 쾌락마. 끔찍한 사건에 호연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고 그것을 막고자 관장들에게 수습을 부탁한 성호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저 모습이 윤진은 보기 싫었다.


“수고했어.”


단상을 내려온 성호의 어깨를 감싸 안고 학생회실로 향하자 지친 얼굴로 성호가 소파에 앉았다. 윤진이 곁에 앉자 바로 기대오는 모습에 고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성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감고 기댄모습 그대로, 성호가 불쑥 입을 열었다.


“고마워. 회연에게 들었어. 동굴에서, 네가 구조대를 불러줬다고.”

“미리 알지 못했는데 뭘. 고마워하지 마.”


고마워하지 마. 결국 네가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으니까.

윤진은 복잡한 속을 숨기고 성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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